“죽으려고 마셨는데 기쁨이”...인류가 사랑한 음료, 알고보니 여기서 시작?

[전형민의 와인프릭]

현존하는 인류 최초의 문학작품, 길가메시 서사시의 ‘홍수 설화’에는 인간들이 번성해 세상에 가득해지자 거룩한 신들이 편히 쉬지 못하게 됐고, 결국 인류를 심판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때 인간을 창조한 신 중 한 명인 에아(Ea)는 이런 사실을 ‘생명을 본 사람’ 우트나피시팀(Utnapishitim)에게 일러주죠. 우트나피시팀은 에아의 전언에 따라 심판을 피하기 위해 엄청난 크기의 방주를 만듭니다. 근데 이 과정에서 재밌는 문장이 나옵니다.

“나는 (방주를 만드는) 일꾼들을 위해 매일 소를 잡고 양을 잡았다. 목수들에게는 실컷 마실 수 있도록 독주, 붉은 술과 기름, 흰 술을 내어 주었다”

학자들은 여기서 언급되는 붉은 술을 레드 와인, 흰 술을 화이트 와인이라고 봅니다. 인류 역사 최초로 와인이 등장하는 문구인 셈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서사시에는 포도로 술을 만드는 ‘시두리(Siduri·젊은 여인)’라는 여인도 등장하기도 하죠.

서사시는 기원전 13~10세기 무렵 한 시인(신-레케-운니니·Sin-leqe-unnini)이 구전으로 전해지던 여러 이야기를 모아서 아카드어로 편집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와인이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음료라는 데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죠.

그렇다면 와인을 가장 먼저 만든 사람은 누굴까요? 와인은 어디서 가장 먼저 만들었을까요? 전 국토를 포도밭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이탈리아? 아니면 현대 와인의 자존심, 프랑스? 설(說)에 가깝습니다만, 오늘은 와인 생활의 소소한 안줏거리가 될 수 있는 대표적인 와인 기원설들을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길가메시가 우트나피시팀을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길가메시 서사시의 점토판. 길가메시는 반신반인의 영웅이자, 전설속 왕국을 다스렸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그에 대한 신화적 이야기를 총 망라한 인류 최초의 서사시다.

아버지의 허벅지에서 태어난 아들
우리가 가장 익숙하게 알고 있는 와인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디오니소스(바쿠스)의 탄생과 얽힌 이야기 입니다.

디오니소스의 아버지는 바람둥이 주신(主神)으로 알려진 제우스인데요.
제우스는 인간 왕국의 공주 세멜레와 동침해 디오니소스를 잉태하게 만들었습니다.

둘의 관계를 질투한 제우스의 부인 헤라는 세멜레의 유모로 변장해 세멜레에게 제우스가 가짜일지도 모르니 진짜모습을 보여 달라 하라고 꼬드깁니다.

잘 알다시피 제우스의 진짜 모습은 번개잖아요. 제우스는 사랑하는 연인과의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데, 결국 세멜레는 번개에 타죽습니다.

이를 아쉬워 한 제우스는 세멜레의 태중에 있는 아이를 꺼내 자신의 허벅지에 넣어 키우고, 이렇게 디오니소스가 탄생하게 됩니다.

제우스는 헤라의 눈을 피해 니사(Nysa)라는 산에서 비의 요정(님프)들에게 디오니소스를 키우게 하는데요. 그 때 디오니소스는 거기서 배운 포도 재배와 양조 기술을 아나톨리라는 오늘날 소아시아 지역의 사람들에게 전수했다고 합니다.

후일 디오니소스는 성인이 되어 올림포스로 돌아올 때 포도주를 가지고 가서 신들을 기쁘게 했고, 그 포상으로 포도와 포도주의 신이 됐다고 하죠. 결국 와인은 디오니소스가 아나톨리 지역 사람들에게 전수하면서 인간의 역사에 뿌리내리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니사산과 아나톨리에 대한 추정은 현대에도 의견이 갈립니다만 대체로 소아시아, 그 중에서도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 인근이 꼽힙니다.

카라바조의 병든 바쿠스. 르네상스 시대 불세출의 괴짜 화가였던 카라바조는 신화 속 주인공의 초상에 자신의 얼굴을 넣는 자학적 악취미가 있었다. 카라바조는 그리스어로 ‘디오니소스’(라틴어로 바쿠스)의 초상에 20대부터 주색(酒色)에 빠져 산 자신의 얼굴을 집어넣었다.

성경의 ‘방주 이야기’에도 존재하는 와인
가톨릭에서 와인은 항상 예수님의 피를 대신하는 중요한 제례 용품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실 겁니다.

창세기에는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와인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기시감을 느꼈던 그 ‘방주 이야기’로 잘 알려진 노아입니다.

노아는 함과 셈, 야벳이라는 세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요. 하루는 노아가 이렇게 심은 포도나무 과실로 와인을 만들어 마시고 대취(大取)해 옷을 훌훌 벗은 채로 잠이 들어버립니다.

술에 취해 실수를 한 셈이죠. 이때 둘째 아들인 함이 아버지의 장막으로 들어갔다가 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고는 뛰쳐나와 형제들에게 그 사실을 자랑하듯 떠벌렸습니다. 하지만 첫째와 셋째인 셈과 야벳은 자신들의 옷을 어깨에 멘 채 행여 아버지의 ‘에르와(히브리어·음부를 뜻함)’를 볼까 뒷걸음질로 다가가 이를 가려주고 나왔죠.

노아는 나중에 술이 깬 뒤에야 전말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둘째인 함에게는 저주,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합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라고요.

근데 이게 보통 저주가 아닙니다. 함에게는 당시 아들 ‘가나안’이 있었는데요. 할아버지가 잘못을 저지른 아버지(함)가 아닌 그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가나안)와 그 자손이 고통 받기를 저주한 겁니다.

올바른 해석은 아닙니다만 한때는 셈과 함, 야벳을 각각 아시아인(황인), 아프리카인(흑인), 유럽인(백인)으로 나눠 인종차별적인 해석을 하기도 했죠. 흑인은 당연히 당시 이 지역의 주 인종인 황인과 백인의 노예가 돼야 한다는 논리로요.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노아의 방주’는 현재 터키와 아제르바이잔 중간지대인 아르메니아 고원에 위치한 아라랏(Ararat) 산맥의 어느 산에 멈춰섰다는 풀이가 꽤 유력하게 추측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조지아는 자신들이 오늘 날 와인의 원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멈춘 것으로 추론되는 아르메니아 고원의 아라랏산 모습. 마치 방주 모습의 산 윤곽이 신비롭다.

죽으려고 마신 액체가 슬픈 마음을 기쁘게
고대 페르시아(혹은 바빌로니아) 왕비의 설화도 있습니다.

당시 왕은 포도를 아주 좋아해서, 왕국 지하창고에 포도를 따다 보관하고 1년 내내 꺼내 먹었다고 하는데요. 포도를 너무 많이 저장해놓다보니 아래에 깔린 포도알들이 으깨지면서 포도즙이 흘러내렸고, 이렇게 흘러내린 포도즙은 껍질에 붙은 자연 효모에 의해 발효됐습니다.

문제는 발효 과정에서 생긴 이산화탄소가 창고 안을 가득 메우게 되면서 창고에 일하러 내려간 인부들이 산소부족으로 픽픽 쓰러지는 일이 생깁니다. 이 때문에 창고는 ‘악마의 저주가 내렸다’는 소문까지 도는데요.

당시 왕에게 미움을 산 왕비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왕궁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창고로 걸어 들어갑니다. 왕비는 컴컴한 창고 바닥에 고인 검붉은 액체를 발견하고 그 액체가 바로 독약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받아 마시죠.

그렇게 죽음을 기다리는데 왠걸,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고 몸에 활력이 생기는 경험을 하죠. 왕비는 곧바로 이 액체를 모아 왕에게 찾아가고, 왕 역시 액체를 마신 후 기분이 좋아지게 됩니다. 결국 왕은 이 음료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고 이를 본격적으로 제조해 널리 전파합니다.

일각에서는 이 왕이 페르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잠쉬드(Jamshid) 대왕이라고 하는데요. 역사에서 대왕은 백성을 위해 무기 제조, 다양한 천의 직조와 염색, 벽돌집의 건축, 보석 등 귀금속의 채굴, 향수·와인의 제조, 제약 기술, 향해술 등을 발명하거나 고안한 성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페르시아 신화 속 전설의 대왕인 잠시드 왕. 그는 백성들에게 무기 제조부터 다양한 천의 직조, 염색, 건축, 채굴, 향수 제조, 제약, 항해술 등 거의 모든 기술을 발명·고안하고 가르친 성군으로 알려져있다. 현재는 중근동에서 남자성인을 지칭하는 일반명사화 해서 사용한다.

‘설’들을 관통하는 그곳은? 바로…
지금까지 소개한 건 사실 설입니다. 과거에는 ‘신화’라는 이름으로 불린 이야기들이죠. 그런데 재밌는 점이 있습니다. 혹시 간파하셨나요? 각 설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 엇비슷하다는 점입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현재로 치면 중동과 소아시아 지역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신화였고요. 디오니소스 이야기 중 디오니소스가 길러졌다는 지역 역시 소아시아 지역으로 짐작됩니다. 노아의 방주로 추측되는 지역과 고대 페르시아 왕국의 영토 역시 소아시아 지역을 포함합니다.

여기에 힌트가 있습니다. 현재까지 출토된 고고학적 유물 중 와인 양조와 관련 가장 오래된 유물이 조지아에서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고고학자들은 조지아에서 와인을 담았던 토기를 발견했고, 내부 잔존 유기물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기원전 6000년까지 거슬러간다는 점을 밝혀냅니다.

고대 조지아인들은 비옥한 토지에서 나는 포도를 재배해 먹고, 남는 것은 땅에 묻은 토기에 담아 보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과정에서 땅에 묻은 토기는 우리의 김장독과 같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죠. 그 외에는 고대 페르시아 왕궁 기원썰과 비슷합니다.

위에 쌓인 무게를 버티지 못한 포도알이 터지면서 즙과 껍질의 효모가 만나 발효가 발생했을 것이고요. 학자들은 그러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와인을 맛본 고대 조지아인들이 본격적으로 와인 양조를 시작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발견된 와인 양조법은 기원전 5000년에는 이란으로, 기원전 4100년경에는 아르메니아로 퍼졌습니다. 중동 일대로 퍼진 와인 양조법은 이집트로 전해지고, 고대 거상들이었던 페니키아인들의 손에 이끌려 그리스 등 유럽으로 퍼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어떤가요? 처음 떠올렸던 이탈리아나 프랑스와는 사뭇 거리가 있지 않나요? 결국 와인은 인류의 정착·농경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됐습니다. 인류가 떠돌아 다니며 수렵 생활을 하던 원시시대를 벗어나 문명시대로 넘어오는 와중에도 인류는 한 손에 와인잔을 쥐고 있었던 셈이죠.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출처: 전형민 매일경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