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고독, 그리고 행복

연말이라며 평소 가깝게 지내는 지인이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고급 중식당에서 몇 가지 딤섬과 요리를 주문해 먹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지인이 들려준 70대 중반의 선배 말을 화제로 우리는 대화를 이어갔다.

- 늙어가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일이라네요.

- 그렇죠. 그런데 사랑이라면 어떤?

- 당연히 아내와의 사랑이죠.

전혀 이상하게 들릴 리 없는 이 말에 나는 흠칫해져 다소 생뚱맞은 대꾸를 했다.

- 늙어서 홀로 남은 남자는 고달프고 서글프다죠. 반대로 여자는 잘 견딘다는데. 그런데 그 분은 아직도 일을 하시는가 보죠?

- 네, 하던 사업은 그만두었지만 간간이 그동안 익혔던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컨설팅하며 푼돈을 벌고 있죠. 그 분 말이 나이가 드니 친구는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대요. 대신 무엇이 되었든 꾸준히 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배우자와의 관계가 좋아야 된대요.

그런데 내겐 왜 이 매력적인 짝, 사랑과 일이 이다지도 멀게만 느껴지는 것인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래, 사랑과 일, 여기에다 건강과 경제적 여유까지 양호하다면 이보다 더 좋은 노년 인생이 있을까.

하지만 이런 호사와 행복을 온전히 누리는 노년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안타깝게도 인생 말년까지 이 모두를 부족함 없이 골고루 다 누리기란 참으로 힘들다.

무리하게 한 가지를 더 얻으려다 다른 한 가지에서 문제를 야기하고 마는 것이 우리네 인생사 아닌가.

말년에 그런 일이 벌어지면 회복도 불가능하다. 며칠 전 읽었던 앤서니 스토의 『고독의 위로』에 나오는 글이 생각났다.

“물론 사랑과 우정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행복의 유일한 요소는 아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변하고 발전한다.

노년이 되면 대체로 인간관계의 중요성이 덜해진다. 어쩌면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이별을 덜 고통스럽게 하려는 자연의 자비로운 섭리일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에든 인간관계에는 불확실성의 요소가 늘기 때문에, 그 인간관계가 완전무결한 것으로 미화되거나 무언가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 될 수는 없다.

아마도 가장 친밀한 관계일 결혼이 그렇게도 불안정한 이유도 사람들이 인간관계를 과대평가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을 행복의 주된 요소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혼생활을 눈물로 끝내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p.17)

두말 할 나위 없이 노년은 상실의 계절이다. 나무가 낙엽을 떨구듯이 풍성하게 누렸던 온갖 것들이 하나둘 떠나가는 계절이 바로 노년이다.

건강과 돈과 사랑과 우정 그리고 일, 때가 되면 이 모두가 하나 둘 곁을 떠나가는 것을 우리는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이를 못내 아쉬워하며 슬픔에 잠긴다. 하지만 이 상실에는 잃는 것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가 이 상실을 ‘떠나감’이 아니라 ‘내려놓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새로운 것들이 다가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유’다. 섭섭함과 원망 그리고 기대 따위를 모두 내려놓음으로써 얻게 되는 자유! 더 이상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마음의 자유! 이것은 진정 노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노년의 행복은 이처럼 고독한 자유 속에서 발견되는 맑고 투명한 선물이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나는 지금의 나를 돌아본다.

나의 하루 일과는 너무도 단순하다. 잠과 식사, 그리고 운동을 제외하고 내가 하는 일이란 독서와 사색, 그리고 글쓰기가 거의 전부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자면 거의 한 주일에 절반은 봉사활동 하러 나가는 아내 대신 집안 살림을 하는 일이다.

요리하기는 이 나이에 내가 익힌 또 하나의 즐거움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코로나 탓이기도 하지만 나는 거의 친구들을 만나지 않는다.

요즘 내가 타인들과 만나는 접촉의 거의 대부분은 책 그리고 글쓰기와 관련한 줌 또는 온라인상의 비대면 접속이다.

일주일에 평균 두 편의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는데 이 역시 나의 중요한 타인과의 소통활동이다. 대체로 나는 이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루틴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 이것으로 특별한 수입을 얻는 건 아니지만 이는 엄연한 ‘나의 일’이다.

아내와의 사랑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이 미안하지만 언젠가 우리가 헤어지게 될 날이 올 것임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여 서로의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포용하고자 노력한다. 아내와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 귀에는 노년 인생에 대한 수많은 전문가들의 조언과는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스토의 『고독의 위로』가 더 잘 와 닿는다. ‘A Return to the Self’라는 영어 원제가 이토록 편하게 들릴 수가 없다.

상실과 고독에 직면한 노년의 나에게 삶의 새로운 의미를 되새기며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는 권유다. 나는 여기서 나오는 행복을 느끼며 살고 싶다. 다시 한 번 스토의 말을 음미한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번식기간을 지나서도 여전히 지속되는 삶 또한 우리에게는 가치가 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인간관계 이외의 것을 향한 흥미와 관심이 더 큰 의미를 지닌다.”(p.18)

출처: 윤영선, 생각날 때 쓰는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