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미 - 항구의 무명초 (장세정.1939)

= 노래 이야기 =

예전 우리 가요에 자주 등장했던 소재는 바로 '항구의 이별'이었습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항구는 배가 정박하는 곳이라기보다는 항상 또 다른 항해를 떠나는 이별의 장소였고요. 그래서 우리 가요에 등장하는 항구의 선창이나 포구의 부두는 만남의 장소라기보다는 이별의 장소로 더 큰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리 가요에도 항구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눈물어린 이별을 하는 노래들이 많이 등장했지요.

특히 항구에서 떠나는 사람은 남자이고, 항구에 남아 이별과 맞이하는 사람은 여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요. 이렇게 항구에서 이별과 마주한 여인들의 아픔과 그리움은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간 남편과 형제, 아버지와 이별한 공간도 결국은 항구였고요. 항구에서의 이별은 역사적으로, 정서적으로 우리 민족의 정한과 연결되었고, '목포의 눈물' '항구의 무명초' '선창' '잘 있거라 부산항'으로 이어지다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비롯해서 최근에도 송가인 씨가 '항구의 아가씨'라는 노래를 발표하면서 항구의 정서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 마음을 울리고 있는데요.

항구를 배경으로 한 노래 중에서 장세정 선배님이 노래한 '항구의 무명초'는 애절한 정서를 담은 대표곡 중에 하나입니다. 1930년대 중반에 등장한 장세정 선배님은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의 노래, 실연의 노래들을 많이 불렀는데요. 이화자, 황금심 선배님이 민요풍이나 타령풍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면, 장세정 선배님은 재즈나 블루스와 같은 서양가락에 맞추면서도 우리민족의 정서에 맞는 노래들을 부르면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장세정 선배님의 노래들을 살펴보면, 단순히 애인끼리의 이별가나 정담을 떠나서 당시 조선사회의 사회상을 부각하는 곡들이 많았습니다. 

이별의 사연, 그리움의 사연, 부두에 얽힌 사연, 압록강과 두만강 등 국경에 얽힌 사연들이 노래에 담기면서 우리민족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는 노래가 바로 장세정 선배님의 노래였는데요. 이런 정서는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이난영 선배님과 같았습니다. 

장세정 선배님이 1937년에 '연락선은 떠난다' 라는 곡을 발표하면서 당시 '목포의 눈물'을 발표해 많은 인기를 누렸던 이난영 선배님과 함께 최고 인기 여가수로 각광받았고요. 이후, 두 선배님은 온국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인기가수로서 함께 경쟁하고 노래했던 정상의 라이벌로 활동했지요. 

장세정 선배님은 열다섯 살 때, 평양의 화신백화점 악기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평양방송국 개국기념 가요 콩쿠르에서 1등을 하면서 노래실력을 인정받았고요. 오케레코드 대표였던 이철 사장은 노래를 듣자마자 당장 계약을 했고, '평양이 낳은 가희'로 장세정 선배님을 선전하면서 장세정 선배님은 부르는 노래마다 히트를 기록했지요. 

그리고 수많은 히트곡 중에 1939년 발표한 '항구의 무명초'는 조명암 선생님이 작사하고 엄재근 선생님이 작곡한 곡으로, 떠나가는 연락선을 야속하게 바라보며 이별에 눈물짓는 여인의 마음을 구슬프게 노래해 많은 사람들을 눈물짓게 만든 노래였습니다.


"울기도 안타까운 부두 위에서
 사랑이 무엇인가 가는 님 잡고 
 몸부림을 칩니다
 태징 소리 울리고 떠나가는 연락선
 끊어지는 테프만이 야속합니다

 ​달빛도 눈물겨운 항구 밖으로
 무정한 연락선은 내 님을 싣고
 속절없이 떠난다
 사랑 없는 세상에 누굴 믿고 살리요
 명색 없는 여자라고 버리지 마소

 등대 불 깜박이는 수평선으로
 떠나간 연락선은 검은 연기만
 달빛 속에 어린다
 원수 같은 이별에 눈물 젖는 내 가슴
 이내 몸은 울며 시든 무명초라오"


무명초(無名草)는 이름이 없거나 알려지지 않은 풀인데요. 이름이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역시 눈앞에서 멀리 떠나간다고 해서 잊히지 않는 것이 그리움이란 정서일 겁니다. 사랑하는 님을 멀리 떠나보내고 하염없이 슬픔에 젖은 항구에서, 그래도 언젠가 돌아오기를 소망하는 무명초 여인의 진심이 가슴을 파고드는 노래가 바로 '항구의 무명초'인데요.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는 사랑하는 님의 모습 떠올리면서 이 추운 겨울날, 잠시나마 뜨거운 그리움을 느껴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