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미 - 순아 (최헌.1979)

= 노래 이야기 =

20세기 스페인의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말했습니다. '시, 노래, 그림은 우물에서 끌어온 물일뿐이니 사람들이 마실 수 있도록 아름다운 잔에 담아 돌려주어야 한다'. 그래서 멋진 시가 노래라는 아름다운 잔에 담기면 평소에 시 한편 외기 힘든 사람들도 노래 가사는 쉽게 부를 수 있고요. 누구나 시의 감동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는데요. 

우리 가요 중에서도 아름다운 시가 노래가 되어서 우리들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줄 때가 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노래도 정말 많은 분들이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곡인데요. 바로 가을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목소리의 주인공, 최헌 선배님의 노래 '순아'입니다.

'순아'의 노랫말은 원래 장만영 시인의 '사랑'이란 시가 원형입니다. 장만영 시인은 1914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나서 1975년에 작고할 때까지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시를 썼는데요. 농촌과 전원의 세계를 현대적인 시어로 표현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특히, 장만영 시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순이'인데요. 수많은 이름들이 있지만, '순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모든 여성을 상징하는 정다운 이름이었지요. 우리 누이 같고, 연모했던 옆집의 처자 같고, 고향에서 나를 기다리는 아내 같은 이름의 '순이'였습니다.


'사랑' (장만영 詩)

서울 어느 뒷 골목 
번지없는 주소엔들 어떠랴, 
조그만 방이나 하나 얻고 
순아 우리 단둘이 사자. 

숨박꼴질하던 
어린 적 그 때와 같이 
아무도 모르게 
꼬옹 꽁 숨어 산들 어떠랴, 
순아 우리 단둘이 사자. 

단 한 사람 
찾아 주는 이 없는들 어떠랴. 
낮에는 햇빛이 
밤에는 달빛이 
가난한 우리 들창을 비춰줄게다. 
순아 우리 단 둘이 사자. 

깊은 산 바위 틈 
둥지 속의 산비둘기처럼 
나는 너를 믿고 
너는 나를 의지하며 
순아 우리 단둘이 사자. 


장만영 시인의 '사랑'은 가난해도 순이와 둘이 함께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안분지족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데요. 이 시에 최주호 님이 곡을 붙여서 발표한 노래가 바로 1979년에 큰 사랑을 받은 '최헌' 선배님의 '순아'입니다. 


'순아' (최주호 작곡, 최헌 노래)

"서울 어느 하늘 아래
 낯설은 주소인들 어떠랴
 아담한 집 하나 짓고 순아 단둘이 살자
 깊은 산 바위 틈 둥지 속에 산비둘기처럼
 우리 서로 믿고 순아 단둘이 살자

 낮에는 햇빛이 밤에는 달빛이
 조그만 우리들 창을 비춰줄거야
 순아 우리 단둘이 살자
 순아 순아 단둘이 살자

 깊은 산 바위 틈 둥지 속에 산비둘기처럼
 우리 서로 믿고 순아 단둘이 살자
 낮에는 햇빛이 밤에는 달빛이
 조그만 우리들 창을 비춰줄거야
 순아 우리 단둘이 살자
 순아 순아 단둘이 살자
 순아 순아 단둘이 살자"


최헌 선배님이 노래한 '순아'는 4집 앨범 '가을비 우산 속'에 수록돼서 큰 사랑을 받았는데요. 최헌 선배님의 가슴을 파고드는 허스키 보이스로 노래한 '순아'는 그 당시 서울로 올라와 돈을 벌기 위해서 공장에서 일했던 누군가의 딸과 누군가의 누이들을 연상시키면서 고단한 시간을 위로해 주는 노래였습니다. 

최헌 선배님은 1970-80년대 최고의 명품 보컬로 손꼽히지요. 한국인이 구사하기 쉽지 않은 깊은 탁성이 매력적이고, 파워 넘치는 가창력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 

대학시절이었던 1967년, 밴드 '차밍가이스'를 결성해서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로 미 8군 클럽에서 활동을 시작한 최헌 선배님은 1971년, 그룹 '히식스(He6)'의 보컬과 기타리스트로 합류하면서 가요팬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요. '히식스'시절 '초원의 빛'을 히트시키면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지만 '히식스'가 해체하면서 1973년에 최헌 선배님은 조동진 선배님이 작곡한 '가로등 불빛 아래'라는 포크송으로 솔로 가수로 데뷔하는데요. 첫 솔로 데뷔곡은 포크송이었지만, 락을 사랑했던 최헌 선배님의 열정은 그대로였고, 1974년 락그룹 '검은 나비'를 결성하고 '당신은 몰라'를 히트시킵니다. 

그러다 1975년 이른바 '대마초 파동'으로 가요 정화조치가 시작되고, 그때까지 트로트와 함께 가요계를 양분했던 포크와 그룹사운드가 위축되는 지각변동이 생겼고요. 이때부터 그룹사운드 출신의 리드 싱어들이 솔로 가수로 등장했는데, 최헌 선배님도 솔로 활동을 하면서 발표한 노래가 바로 불후의 명곡인 '오동잎'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동잎'을 시작으로 가요계엔 락이나 고고 리듬을 트로트와 접목한 트로트 고고 시대가 열렸고요. 최헌 선배님은 '앵두' '어찌합니까' '구름 나그네' '가을비 우산 속' '순아'를 연달아 히트시키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목소리가 되었지요.  

얼마 전 개봉했던 영화 '밀수'에서 최헌 선배님의 '앵두'가 흘러나오는 순간, 최헌 선배님의 목소리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팬들은 벅차오르는 반가움과 감동을 느끼셨을 거예요. 그리고 최헌 선배님을 몰랐던 젊은 세대들 역시 그 허스키하고 멋진 목소리에 다시금 빠져들었는데요. 

지인들에게 인간적이고 따뜻했던 사람으로 소탈하고 인정 많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는 최헌 선배님이 몹시도 그리워지는 이 계절, 포근한 위로를 전해주는 '순아'를 감상하시면서 허전한 마음 달래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