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권 - 다시 이제부터

 

 

 

 

“내가 이대로는 안되겠어. 강릉 경포대에 가면 하루 종일 엄마, 아빠, 아이들을 태우고 뛰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의 눈을 보니까 나 같아서 나도 모르게 그 말에게 인권아, 하고 불렀다니까.”

1997년 나는 구 중앙청 앞 ‘전인권 구락부’(중앙청이 헐리기 전 삼청동에 사는 마의천 도사가 소개하고 이름도 지어준, 밴드 연습실 겸 맥줏집)를 도망치듯 나왔다. 어느새 5년이 지났고 나는 그 5년 동안 30평의 작은 공간인 ‘전인권 구락부’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 부끄럽지 않은 내 삶 중 5년이었다.

[전인권의 내인생] 다시 이제부터

나는 집에 있던 간단한 녹음 장비와 기타를 들고 무작정 제주도로 갔다. 필요한 돈은 지금은 이름을 밝히기 곤란한 앨범 제작자에게 요청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좋은 노래를 만들려면 좋은 환경이 필요하다. 이 복잡한 도시에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바쁘기 때문에 좋은 곡을 만들고 부르기가 힘들다.”

제작자는 젊고 시원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원을 약속했다.

제주도 논짓물, 중문에서 걸어서 한 시간 반 정도 되는 곳에 터를 만들었다. 그러나 10월부터 12월까지 대략 두어달간 내가 경험한 제주도는 길어봐야 일주일 정도 머물기에 좋다고 생각했다. 

바다로 둘러싸이고 돌집이 많은 제주도는 그 계절, 변덕이 심한 바람과 추위 탓에 몹시 힘겨웠다. 나는 ‘이곳은 죽기는 쉬워도 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고 추워도 속초가 낫겠다고 생각해 설악산으로 갔다. 

역시 망망대해보다 산이 나한테는 어울린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해는 20년 만에 큰눈이 내린 해이기도 했다. 170㎝ 쌓였다고 들었다.

나는 친구의 도움으로 콘도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또 시작이다. 내 나이 어느새 40대 중반이었다.

첫날 오전 4시에 울린 알람 소리에 벌떡 일어나 전기밥솥에 해둔 밥에 카레를 부어 먹고 콘도를 나와 걸었다. 이날도 눈이 내리고 있었고 거리는 한밤중처럼 깜깜했다. 가끔씩 가로등이 보였고, 곧바로 언덕길이 이어졌다. 

나는 조금씩 뛰어보기도 했다. 미끄럽지 않다고 생각한 순간, 거센 눈발이 앞을 가리고 위험이 느껴졌다. 고함을 질렀다. 그 기분 그대로 노랫말 가사를 섞어서 “바람이 분다. 나를 내려가라 한다. 내가 찾은 설악산에 바람이 분다. 악! 악! 악! 악!”

어느새 나는 평지로 올라섰다. 다른 콘도들이 보였다. 아직 열지 않은 어두침침한 집들. 어제 봐두었던 식당들이다. 그리고 어떤 대규모 행사장이 보였다. 그곳은 문을 찾기 힘들었다. 왠지 들어가보고 싶어 한 바퀴 돌아보는데 너무 큰 평지여서 그런지 이내 열기가 사라졌다. 

나는 다시 걸으며 온몸에 힘을 주고 소리를 질러댔다. 소리 지를 때는 어깨에 힘을 주지 않는다. 그래야 내 가슴 깊숙한 곳까지 뒤흔드는 시원한 소리를 낼 수 있다. 설악산 얘기는 다음에 다시.

나는 방금 전 이 글을 쓰다가 문밖으로 나갔다. 해마다 어김없이 피는 꽃들. 앵두나무꽃이 피어 있었다. 벚꽃, 진달래, 개나리도 화창하게. 갑자기 내 눈앞에 꽃길과 언덕과 내가 노래하는 소리가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이어 언젠가 본 것 같은 바다, 가도 가도 끝없는 바다가 펼쳐졌다. 

그리고 난데없이 둥근 구름다리가 바다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구름다리 위에 있고 지나온 다리길은 보이는데 앞길은 보이질 않는다. 지금은 저세상으로 간 나의 친한 친구 얘기가 생각났다. “신의는 내가 나를 믿는 것이라고 생각해.”

내가 나를 믿는다, 참 멋있는 말이다. 나는 지금까지 어떤 일이 주어지거나 누군가와 인연을 맺으면서 머릿속으로 계산을 한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뭔가를 보면 그림을 그려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잘 속는다. 앞이 안 보여도 간다. 

나는 나를 믿었다. 그리고 결국 이겼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듯이 내 마음속에 드는 공허감은 어쩔 수 없지만 당장은 괴로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 꽃이 피고 있다. 그리고 내 눈앞에는 내가 그린 판소리가 어우러진 멋진 그림이 있다.

다시 이제부터….

2019.04.10 20:36 전인권 싱어송라이터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