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 기형도

빈집 /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입 속의 검은 잎/문지사/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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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 모든 것이었던 사랑을 잃고 무엇을 온전히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수 있다는 말일까요? 그랬을 테지요. 사랑을 잃고 사랑의 절망 속에서 분명 그도 그랬을 겁니다.

 

분명 기형도 시인도 김용택 시인이 선운사의 살얼음 낀 시냇물을 맨발로 건너가며 그 시림을 잘 참아 내다 그깟 동백 때문에 와르르 한순간 무너져 눈물을 흘렸듯이 그도 잘 견뎌보려 이를 악물었을 테지요.

 

그러다 흰종이로도, 그리움에 서성대다 대신하던 눈물로도,

결코 그 무엇도 사랑을 대신할 수 없음을 알았을 때 자신의 몸 안에 그 어쩌지 못할 가련한 사랑의 문을 잠그고 간직하게 할 수 밖에 없었겠지요. 때때로 사는 일이 그런가 합니다.

 

끌어안고도 다 잃든가,

다 내어주고도 다 얻든가,

다 내어주고, 다 얻거나 다 잃거나..

 

그러기 위해서 자기 몸 안에 빈집, 빈방 하나 들여놓고 사는거지요. 그 빈집에 군불을 때든지, 텅텅 소리가 나는 울림증을 간직하든지. 그런 의미에서 기형도의 빈집은 우리 모두의 방이기도 합니다.

 

【기형도(奇亨度)(1960. 2.16 -1989. 3,7)】

스물 아홉의 짧은 생을 살다 뇌졸증으로 죽어간 시인 기형도.

파고다 극장 심야영화를 보다 후미진 객석에서 스르르 연극 속 외로운 주인공처럼 죽어간 시인.

 

연극이 끝난 뒤 객석에 불이 켜지고 모두가 떠난 그 자리에서 기어코 일어나지 않았던 남자, 아깝고 안타까운 기형도시인.

그래서 그의 시를 읽으면 가슴이 쩍 하고 벌어지는 것일까요?

 

문학 평론가 류산님이 말하길 '그의 시는 이미 신화의 궤도에 진입했다'고 평한 바 있지요.

죽음을 통해 다시 신화로 환생하는 끈질긴 저력, 불사의 시!

 

【실로 그의 시는 끔찍한 아름다움이 있다.】라고

누군가 끔찍하게 아름다운 찬탄을 보냈는데 그 아까운 천재 시인은 우리 곁을 너무 빨리 떠나고 말았군요. 그의 시 노을의 끝부분에 '펄펄 살아있는 우리는 이제 각자 어디로 가지?" 하고 외치던 젊은 시인의 소리가 제 안에 여러 날 돌며 울리던 쓸쓸한 마음이 이 밤 그의 시 앞에 서니 다시금 아프게 되살아납니다.

 

펄펄 살아 있어주길 소망하는 마음이 이 시대 시의 선 하나, 확실히 긋고 떠난 불우했던 시인을 생각하니 덧없이 애잔하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 펌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