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미 - 에레나가 된 순이 (안다성.1954)

= 노래 이야기 =

전쟁은 하루아침에 평화롭던 우리의 일상을 파괴해버리고, 우리가 가슴에 품고 사는 꿈이 피어나기도 전에 꺾어버리면서 온 세상을 비극으로 만들어버리는데요. 6/25 전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순간에 정든 집과 고향을 떠나야했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맨몸으로 피난살이를 해야했던 사람들은 모두 가난에 찌들 수밖에 없었고요. 

전쟁이 끝났어도 전쟁으로 황폐해진 우리나라는 생산물자는 거의 없었고, 부산항 제2부두, 군산항, 인천항 등를 통해 들어오는 외국의 전쟁 물자와 구호물품이 유일한 삶의 핏줄이었습니다. 결국, 먹고 살기 위해서 아이들은 지나가는 미군들에게 ‘헬로, 기브 미 쪼코렛’이라는 어설픈 영어를 외치며 구걸해야만 했고, 나이가 찬 여자아이는 술집의 여급이 되어 술을 팔고 웃음을 팔면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는데요. 

외국군인들을 상대하면서 본래 이름 대신 외국이름을 썼는데, ‘선우 휘’작가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깃발 없는 기수’라는 작품에서 신문기자와 하룻밤을 보낸 기지촌의 여급 ‘에레나’는 다음날 이런 말을 합니다. “같이 잔 남자가 아침에 우리말 들려주기는 당신이 처음이에요. 안녕히 가세요. 다시는 오지 마세요". 역시 6·25전쟁의 격동 속에서 개인들의 삶이 어떻게 힘들어지고 피폐해졌는지를 보여주는 노래가 바로 ‘에레나가 된 순이’인데요. 

원래 순이는 평범하고 순박한 농촌소녀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의지할 곳 없는 처량한 신세로 피난민 행렬에 떠밀려 순이는 부산까지 흘러왔구요. 낯선 곳에서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서 순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유흥가의 여인이 되는 것뿐이었죠. 

고향의 석유 등잔 밑에서 어머니와 마주 앉아 실꾸리에 실을 감으며 혼사 준비를 하던 농촌 소녀 순이가, 밤 깊은 카바레에서 이름조차 에레나로 바꾼 채,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를 둘러쓰고 술과 웃음을 팔아야하는 슬픈 이야기를 그린 노래가 바로 ‘에레나가 된 순이’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움이 몰아칠 땐 혼자 항구에 나가 눈물을 삼키는 에레나는 우리 고향의 수많은 순이들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그날 밤 극장 앞에서 그 역전 카바레에서
보았다던 그 소문이 들리는 순이
석유불 등잔 밑에 밤을 새면서
실패 감던 순이가 다홍 치마 순이가
이름조차 에레나로 달라진 순이 순이
오늘 밤도 파티에서 춤을 추더라

그 빛깔 드레스에다 그 보석 귀걸이에다
목이 메어 항구에서 운다는 순이
시집 갈 열아홉 살 꿈을 꾸면서
노래하던 순이가 피난 왔던 순이가
말소리도 이상하게 달라진 순이 순이
오늘 밤도 파티에서 웃고 있더라 “

한복남 선생님이 작곡하고, 손로원 선생님이 작사한 이 노래는 1953년, ‘한정무’선배님의 목소리로 먼저 취입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에레나 가 된 순희’(잊지 못할 순희)라는 제목으로 발표됐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자, 한복남 선생님은 제목을 ‘에레나가 된 순이’로 바꾸고 맨 마지막 가사도 원래는 ‘오늘밤도 양담배를 피고 있더냐’였지만, ‘오늘밤도 파티에서 웃고 있더라’로 순화시켜서 ‘안다성 선배님에게 재취입을 시켰는데요. 

안다성 선배님이 노래한 ’에레나가 된 순이‘는 정말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사랑받게 됩니다. ’에레나‘라는 이름은 ’헬렌‘이라는 여자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에레나가 된 순이‘가 히트하면서 김성현 선배님의 ’추억의 에레나‘, 위키리 선배님의 ’항구의 에레나‘, 남일해 선배님의 ’명동의 에레나‘와 같은 노래들이발표되었고요. 

우리 가요 속에서 ’에레나‘는 가난 때문에 꿈을 잃고 살아가는 서글픈 처지의 여성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사용되면서 1956년에는 ’에레나‘로 불린 여성들이 무려 11만명이나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6. 25전쟁과 분단, 그리고 전쟁후의 궁핍이 낳은 수많은 에레나들은 꿈 많던 우리 이웃집 누나였고, 고향의 뒷동산에서 연분홍 저고리를 입고 나물을 캐던 순박한 소녀 ’순이‘였는데요. 

전쟁과 가난으로 인해 ’순이‘가 ’에레나‘가 되면서 그리운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꿈에 그리던 가족들에게 지금의 모습을 보여주기 수치스러워 만날 수도 없고, 홀로 말 못하는 설움과 슬픔을 삼킨 채 살아가야했던 에레나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우리 가슴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오영수 작가의 소설 ‘안나의 유서'에는 이런 글이 나옵니다. ”전쟁으로 인해서 나는 고아가 됐다. 배가 고팠다. 철든 계집아이가 살을 가릴 옷이 없었다. 이것이 내 죄가 될까? 그래서 나는 안나가 됐다. 한 끼 밥을 먹기 위해서 피를 뽑아 팔 듯 나는 내 몸뚱어리를 파 먹고 스물여덟을 살아왔다.”

다시는 이런 시대의 비극이 반복되질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더 이상은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없길 바라면서!! 그 옛날 우리의 정다운 순이 누나와 순이 언니들의 서러운 슬픔을 위로하며 이 노래를 불러봅니다.